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 (문단 편집) == 비판 == 작가인 [[공지영]]의 [[사형제]] 반대의 근거가 '''사형수는 불쌍한 사람들이므로 사형제를 하지 말아야 한다'''는 논리로 비판받았다. 작품 마지막 부분에 이르면, 윤수가 살인을 저지른 주범이 아니라는 것이 밝혀지는데, 그것은 결국 사형제 논란의 핵심을 빗겨가는 공허한 결론이 된다. 억울하게 죄를 뒤집어쓴 사람을 사형해선 안 되는 건 당연하다. 문제는 '''정말로''' 중죄를 저지른 사람을 법적 살인으로 처벌할 수 있느냐에 달려 있는 것이다. 하지만 사형제 폐지에 대해 다룬 반전 영화인 <데이비드 게일> 역시 '누명을 쓴 사람이 억울한 죽게 될 수 있다'는 근거를 들어서 사형제를 반대했으므로, 윤수가 주범이 아니었다고 해서 작품에서 주장하는 내용이 모두 무의미해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사형이라는 폭력적 제도를 통해서 평화를 이룩할 수 있다는 믿음은 옳은가'라는 메시지를 효과적으로 전달하고 있다고 봐야 한다. 물론 [[사형]]의 불가역성을 비판하고자 했을 때, 이러한 설정은 어느 정도 유의미할 수도 있다. 즉, 징역과는 달리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처벌당한 사람(과 그 유족들)의 한을 해소해 줄 방법이 없다는 점. 그러나 이에 대한 [[공지영]] 작가의 반박을 보면 그런 의도였다고도 할수 없다. 공지영 작가가 "윤수는 실제로 살인을 했다. 살해당한 모녀 중 딸을 죽인 것이 윤수. 다만 책 속에 언급되지 않았을 뿐이다."라는 [[서술 트릭]]에 가까운 변명을 했기 때문이다. 이것 자체를 나쁘다고 비판할 수도 있지만 그보다는, 결국 이런 식으로 살인 여부를 너무 모호하게 처리하는 바람에 정말 살인을 했냐 안했냐에 대해서 갑론을박이 벌어지고, 이와 동시에 사형제 자체에 대한 고민이 희석되어 버리는 문제점이 더 컸다. 다만 이 문제에 대해서도 반론의 여지가 있는 것이, 윤수의 블루노트를 읽어보면, 그의 친구가 칼로 찌른 소녀가 죽지 않고 기어나오는 모습을 윤수가 보았다는 서술이 있다. 따라서 윤수가 딸을 죽였으리라는 짐작을 할 수 있게 만드는 서술이 작중에 있었고, 판단은 독자들의 몫으로 남겨두었던 내용을 작가가 시간이 지나고 해설해준 것에 불과하다고 볼 수도 있다. 하지만 문학적으로 이 소설의 진짜 문제는, 작가가 정말 문학을 전공했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신파적인 [[클리셰]]를 남발'''하고 있다는 것이다. 사형제 폐지론을 주장하는 작품에서는 거의 천편일률적으로 작중 중요한 사형수는 항상 천인공노할 죽어 마땅한 흉악범이 아니라 뭔가 특별한 말 못한 사정이 있는 사형으로 단죄되기에는 뭔가 참작할 면도 있는데, 그게 고려되지 않았다는 식으로 표현된다. 그러나 '''현실에서 그런 불쌍한 사형수는 사실상 존재하지 않을 뿐더러, 실제 사형수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저열하고 악질적인 자들이다.''' 즉, 이 작품은 사형제 존치에 대해 법리적, 윤리적 잣대로 논하는 것이 아니라 [[이 녀석도 사실은 좋은 녀석이었어]], [[이 녀석도 사실은 불쌍한 녀석이었어]] 같은 진부한 클리셰와 [[감성팔이]]를 동원하여 독자들을 선동하고 있을 뿐이다. 비슷한 소재를 다룬 영화로 [[데드 맨 워킹]](1996)이 있는데, 이쪽은 수녀와 사형수를 주인공으로 [[사형제]] 자체에 대한 고뇌를 훨씬 객관적인 시선에서 심도 있게 다루고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